언어학
언어학 1단계: 언어의 본질부터 소리의 과학까지
1부. 이론적 기초 — 언어란 대체 무엇인가?
인간이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가진 능력이 무엇인지 생각해본 적 있는가? 불을 피우는 것도, 도구를 쓰는 것도 아니다. 침팬지도 도구를 쓰고, 까마귀도 문제를 푼다. 그런데 인간만이 "어제 내가 상상했던 것"을 오늘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다. 존재하지 않는 것, 과거의 것, 미래의 것, 추상적인 것을 공유할 수 있는 이 능력이 바로 언어다. 언어학(Linguistics)은 이 능력을 과학적으로 해부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언어를 정의하려 하면 곧 벽에 부딪힌다. "언어는 의사소통 수단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개도 짖어서 의사소통하고 꿀벌도 춤으로 방향을 전달한다. 그러니 언어학자들은 훨씬 더 정밀한 질문을 던졌다. "인간의 언어는 다른 동물의 신호 체계와 무엇이 다른가?" 이 질문에 체계적으로 답한 최초의 인물이 스위스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다. 그는 흔히 '현대 언어학의 아버지'라 불리며, 그의 강의를 제자들이 정리한 『일반 언어학 강의(Cours de linguistique générale, 1916)』는 언어학뿐 아니라 철학, 문학이론, 인류학 전체를 뒤흔든 책이다.
소쉬르가 제안한 가장 핵심적인 구분이 **랑그(langue)**와 **파롤(parole)**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체스를 생각해보자. 체스에는 두 가지 층위가 있다. 하나는 '체스의 규칙' — 나이트는 L자로 움직이고, 킹을 잡으면 이긴다는 규칙의 체계. 다른 하나는 '특정 날 두 사람이 실제로 두는 게임' — 오늘 이 대국에서 어떤 수가 실제로 놓였는지. 랑그는 전자에 해당한다. 언어 공동체가 공유하는 추상적인 규칙의 체계, 즉 "한국어를 한국어답게 만드는 문법·음운·어휘의 총체적 구조"다. 파롤은 후자다. 내가 지금 이 순간 실제로 발음하고, 쓰고, 뱉어내는 구체적인 언어 행위다. 소쉬르는 언어학이 파롤의 혼란스러운 변이(각 사람마다 목소리가 다르고, 사투리가 있고, 말실수가 있고)에 휩쓸리지 말고, 그 아래에 있는 랑그의 체계를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트 기록] 랑그 vs 파롤: 랑그 = 언어 공동체가 공유하는 추상적 규칙 체계 (사회적) / 파롤 = 개인이 실제로 발화하는 언어 사용 (개인적, 구체적). 체스 비유: 규칙 = 랑그, 실제 게임 = 파롤.
소쉬르의 또 다른 혁명적 개념은 **기호(signe)**의 구조다. 그는 언어의 단위인 기호가 두 면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기표(signifiant, 시니피앙)**와 **기의(signifié, 시니피에)**다. 기표는 소리 이미지, 즉 우리 머릿속에 있는 /나무/라는 음성 패턴이다. 기의는 개념, 즉 '줄기와 가지와 잎이 있는 식물'이라는 의미다. 이 둘이 결합해서 하나의 기호가 된다. 여기서 소쉬르가 강조한 결정적 특성이 바로 **자의성(arbitrariness)**이다.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필연적인 연결이 전혀 없다. '나무'라는 소리가 왜 그 개념을 가리켜야 하는 이유는 없다. 영어로는 'tree', 프랑스어로는 'arbre', 일본어로는 'き(ki)'다. 어느 쪽이 더 '나무스럽다'고 할 수 없다. 단지 해당 언어 공동체가 그렇게 약속했을 뿐이다.
잠깐, 그렇다면 의성어는 어떨까? '쨍그랑', 'boom', '짹짹' 같은 단어는 소리를 흉내 낸 것이니 자의적이지 않은 것 아닌가? 이것이 바로 네가 스스로 생각해봐야 할 지점이다. 언어학자들은 이에 대해 흥미로운 답을 내놓는다 — 개가 짖는 소리를 한국어에서는 '멍멍', 영어에서는 'woof', 일본어에서는 'ワンワン(완완)'이라고 한다. 같은 소리인데 언어마다 다르게 표현된다. 의성어조차도 완전히 자의적이지 않지만, 언어 체계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자의성과 함께 언어의 또 다른 핵심 특성이 **체계성(systematicity)**이다. 언어는 무작위 기호들의 모음이 아니라, 각 요소가 다른 요소들과의 차이와 관계를 통해 의미를 갖는 구조다. 소쉬르는 "언어에는 차이만 있을 뿐"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밥'이라는 단어가 의미를 갖는 것은 '밥'이라는 소리 자체에 뭔가가 들어있어서가 아니라, '밥'이 '밖', '발', '봄', '빵'과 구별되기 때문이다. 체계 안에서의 위치가 의미를 만든다. 이 통찰은 20세기 언어학, 철학, 문화이론 전체의 기초가 되었다.
이 기호의 이론을 더 넓게 확장한 학문이 **기호학(Semiotics)**이다. 소쉬르와 거의 동시에 미국 철학자 **찰스 샌더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도 독자적으로 기호이론을 발전시켰는데, 퍼스는 기호를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도상(icon)**은 대상과 닮은 기호 — 사진, 지도, 그림이 여기 해당한다. **지표(index)**는 대상과 인과적으로 연결된 기호 — 연기가 불을 가리키고, 발자국이 사람을 가리키듯. **상징(symbol)**은 자의적 약속으로 연결된 기호 — 언어의 단어들이 대부분 여기 해당한다. 언어는 주로 상징으로 이루어진 기호 체계다.
[노트 기록] 소쉬르의 기호: 기표(시니피앙, 소리 이미지) + 기의(시니피에, 개념) = 기호. 자의성: 기표-기의의 연결에 필연성 없음. 퍼스의 3분류: 도상(닮음) / 지표(인과) / 상징(약속). 언어 = 주로 상징.
2부. 본 내용 — 소리의 과학: 음성학과 음운론
이제 언어의 가장 물질적인 층위, 즉 소리로 내려가보자. 언어는 공기의 진동이다. 우리가 말을 할 때, 폐에서 나온 공기가 다양한 신체 기관을 거치면서 특정한 패턴으로 변형되고, 그것이 음파가 되어 상대방의 귀로 들어간다. **음성학(Phonetics)**은 이 소리의 물리적, 생리적 측면을 연구한다. 즉, "소리가 어떻게 만들어지고(조음음성학), 어떤 음파 형태를 갖는가(음향음성학), 어떻게 지각되는가(청각음성학)"를 연구한다. 반면 **음운론(Phonology)**은 한 발 물러서서 "그 소리들이 특정 언어의 체계 안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가"를 연구한다. 음성학이 소리의 물리학이라면, 음운론은 소리의 사회학이라고 할 수 있다.
조음기관과 IPA
소리를 이해하려면 먼저 소리를 만드는 기관을 알아야 한다. **조음기관(articulatory organs)**이란 말소리를 만드는 데 관여하는 모든 신체 기관을 통칭한다.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능동적 조음기관(active articulator)**은 움직이는 기관으로, 혀(tongue), 아랫입술(lower lip), 아래턱(lower jaw), 연구개(soft palate), 후두(larynx)가 있다. **수동적 조음기관(passive articulator)**은 움직이지 않고 능동 기관이 접근하거나 닿는 고정된 표면으로, 윗입술(upper lip), 윗니(upper teeth), 치조(alveolar ridge, 이 바로 뒤의 딱딱한 돌출 부분), 경구개(hard palate), 연구개(velum), 인두(pharynx)가 있다. 연구개는 조음 시 움직이기도 하므로 두 역할을 모두 한다.
혀는 특히 중요하다. 혀의 어느 부분이 어느 수동적 기관에 얼마나 가까이 접근하느냐에 따라 자음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혀끝(laminal/apical), 혀앞면(blade), 혀몸통(dorsum), **혀뿌리(root)**가 각각 다른 소리를 만든다. 지금 이 순간 'ㄴ'을 발음해보라. 혀가 어디에 닿는가? 치조, 즉 윗니 바로 뒤다. 'ㄱ'을 발음하면? 혀 뒤가 연구개에 닿는다. 'ㅂ'은? 두 입술이 만난다. 이것이 조음의 원리다.
[노트 기록] 조음기관 구조 직접 그리기: 입, 코, 후두의 단면도에 다음을 표시 — 두 입술 / 윗니 / 치조 / 경구개 / 연구개(연구개수) / 혀(끝/앞/몸통/뿌리) / 성대 / 인두.
자음을 분류하는 세 가지 기준이 있다. 첫째, 조음위치(place of articulation): 어디서 만들어지는가. 두 입술 → 양순음(bilabial, ㅂ·ㅍ·ㅁ), 아랫입술과 윗니 → 순치음(labiodental, 영어 f·v), 혀끝과 치조 → 치조음(alveolar, ㄷ·ㄴ·ㄹ), 혀앞면과 경구개 → 경구개음(palatal, ㅈ), 혀뒤와 연구개 → 연구개음(velar, ㄱ·ㅇ[ŋ]), 성대에서만 → 성문음(glottal, 영어 h·한국어 ㅎ). 둘째, 조음방법(manner of articulation):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기류를 완전히 막았다가 터트리면 → 파열음(plosive/stop, ㅂ·ㄷ·ㄱ), 막으면서 코로 흘리면 → 비음(nasal, ㅁ·ㄴ·ㅇ[ŋ]), 좁은 틈으로 마찰시키면 → 마찰음(fricative, ㅅ·ㅎ, 영어 f·s·sh), 파열과 마찰을 동시에 → 파찰음(affricate, ㅈ·ㅊ·ㅉ), 공기를 혀 옆으로 흘리면 → 설측음(lateral, ㄹ). 셋째, 성대 진동 여부: 성대가 울리면 유성음(voiced), 울리지 않으면 무성음(voiceless). 목에 손을 대고 'ㅂ'과 'ㅍ'를 비교해보라. 아니면 영어 'v'와 'f'를 비교해보자. 'v'를 발음할 때는 목이 울리고, 'f'는 울리지 않는다.
모음(vowel)은 자음과 달리 기류가 구강에서 큰 방해 없이 흘러나오면서 만들어진다. 모음의 분류는 세 가지 기준으로 한다. 혀의 높이(height): 혀가 높으면 고모음(high, 이·위), 낮으면 저모음(low, 아). 혀의 전후 위치(backness): 혀가 앞에 있으면 전설모음(front, 이·에), 뒤에 있으면 후설모음(back, 우·오), 중간이면 중설모음(central, 어). 입술 모양(rounding): 입술이 둥글면 원순모음(rounded, 우·오·위), 아니면 비원순모음(unrounded, 이·에·아). 지금 '이'부터 '아'까지 천천히 소리를 이어서 내보면 혀가 높은 위치에서 낮은 위치로 이동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모든 소리를 세계 모든 언어에 걸쳐 표기할 수 있도록 만든 표준 체계가 바로 **IPA(International Phonetic Alphabet, 국제음성기호)**다. 1888년 국제음성학회(International Phonetic Association)가 창설되면서 만들어진 이 체계는 오늘날 언어학, 언어 교육, 음성공학 전반에서 사용된다. IPA의 핵심 원칙은 하나다: "하나의 기호는 정확히 하나의 소리를, 하나의 소리는 정확히 하나의 기호로." 영어 철자처럼 같은 글자가 여러 소리를 가리키는 모호함이 없다. 예를 들어 영어 'a'는 'cat'에서 [æ], 'father'에서 [ɑː], 'cake'에서 [eɪ], 'about'에서 [ə]로 발음된다. 하지만 IPA에서는 각각이 완전히 다른 기호다. IPA는 대괄호 [ ]로 **음성 전사(phonetic transcription)**를 표시하고, 사선 / /로는 잠시 후에 배울 **음운 전사(phonemic transcription)**를 표시한다.
[노트 기록] 핵심 IPA 기호 외울 것: 한국어 — [p][b][t][d][k][ɡ][m][n][ŋ][s][ɕ][tɕ][r][l][h] + 모음 [i][e][ɛ][a][o][u][ɯ][ø][ʌ]. 영어 추가 — [f][v][θ][ð][ʃ][ʒ][tʃ][dʒ][æ][ɑ][ə][ɜː][ɪ][ʊ][eɪ][aɪ][ɔɪ][aʊ][oʊ].
음운론: 소리의 기능
음성학이 소리 자체를 연구한다면, 음운론은 소리가 언어 체계 안에서 어떻게 의미를 구별하는 기능을 하는지 연구한다. 여기서 핵심 개념이 **음소(phoneme)**다. 음소는 의미를 구별하는 기능을 하는 가장 작은 소리 단위다. 어떤 두 소리가 음소 차이인지 알아보는 방법이 있다. **최소대립쌍(minimal pair)**을 찾으면 된다. 최소대립쌍이란 딱 하나의 소리만 다르고 나머지는 동일한데, 의미가 달라지는 두 단어 쌍이다. 예: '발'[bal]과 '팔'[pʰal] — /ㅂ/과 /ㅍ/만 다른데 의미가 다르다. 따라서 한국어에서 /ㅂ/와 /ㅍ/는 서로 다른 음소다. '산'과 '잔' — /ㅅ/와 /ㅈ/의 차이, 의미가 다르다. 이렇게 최소대립쌍을 통해 어떤 소리가 해당 언어의 음소인지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같은 음소라도 주변 환경에 따라 실제 발음이 약간씩 달라질 수 있다. 이렇게 한 음소의 실제 발음 변이형을 **이음(allophone)**이라고 한다. 이음들은 의미를 구별하지 않으며, 서로 **상보적 분포(complementary distribution)**를 이룬다 — 즉, A라는 이음이 나타나는 환경에서는 B라는 이음이 절대 나타나지 않고, 반대도 마찬가지다. 영어의 /p/를 예로 들자. 'pin'에서 /p/는 강하게 공기를 내뿜으며 발음된다([pʰ]). 하지만 'spin'에서 /p/는 공기를 거의 내뿜지 않는다([p]). 이 두 소리 [pʰ]과 [p]는 영어에서는 같은 음소 /p/의 이음이다 — 's' 뒤에서는 [p], 어두에서는 [pʰ]. 그런데 힌두어에서는 [pʰ]과 [p]가 의미를 구별하는 별개의 음소다! 같은 물리적 소리 차이가, 어떤 언어에서는 음소 차이이고 다른 언어에서는 이음 관계가 된다는 것 — 이것이 바로 음운론이 단순한 음성학과 다른 지점이다.
[노트 기록] 음소(phoneme): /슬래시로 표기/, 의미 구별 기능, 추상적. 이음(allophone): [대괄호로 표기], 한 음소의 발음 변이형, 구체적. 관계: 음소는 이음의 집합. 최소대립쌍으로 음소 확인.
**음운규칙(phonological rules)**은 한 언어에서 어떤 환경에서 어떤 소리가 어떤 소리로 변하는지를 체계적으로 기술한 규칙이다. 한국어는 음운 규칙이 특히 풍부한 언어다. 몇 가지 핵심적인 것만 살펴보자.
연음(resyllabification/liaison): 받침이 있는 음절 뒤에 모음으로 시작하는 음절이 오면, 받침이 다음 음절의 초성으로 이동한다. '먹어'는 [머거]로, '국이'는 [구기]로 발음된다. 철자와 발음이 다르다는 것을 아는가? 이것이 바로 음운 규칙이 작동하는 증거다.
비음화(nasalization): 파열음 ㅂ·ㄷ·ㄱ이 비음 ㄴ·ㅁ 앞에 오면 비음으로 변한다. '국물'은 [궁물]로, '입문'은 [임문]으로, '먹는다'는 [멍는다]로 발음된다. 왜 그럴까? 비음을 발음하려면 연구개를 내리고 코를 열어야 하는데, 그 준비가 앞 음절의 파열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조음 기관의 운동이 겹치는 동화(assimilation) 현상이다.
경음화(tensification/fortis): 장애음(파열음, 파찰음, 마찰음) 뒤에서 평음이 경음이 되는 규칙. '학교'는 [학꾜], '입장'은 [입짱], '있다'는 [읻따]로 발음된다. 이 모든 음운 변동은 무작위가 아니라 조음적·음향적 이유가 있는, 체계적인 변화다. 소쉬르가 말한 '체계성'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초분절음소
지금까지는 낱낱의 분절음(segmental sounds), 즉 자음과 모음을 살펴봤다. 그런데 말소리에는 개별 음소를 넘어서 여러 음절에 걸쳐 실현되는 소리의 특성이 있다. 이를 **초분절음소(suprasegmental phoneme)**라 한다. 강세, 억양, 성조가 대표적이다.
**강세(stress)**는 특정 음절을 다른 음절보다 더 두드러지게 발음하는 것이다. 영어는 강세 언어(stress language)의 대표적 예다. 'REcord'(명사, 기록)와 'reCORD'(동사, 녹음하다)는 같은 철자인데 강세 위치에 따라 품사와 의미가 달라진다. 한국어는 표준어에서 강세가 의미를 구별하지 않지만, 경상도 방언은 성조 체계를 가지고 있어 흥미롭다.
**억양(intonation)**은 문장 전체에 걸쳐 음의 높낮이가 변하는 패턴이다. "밥 먹었어."를 내리는 억양으로 말하면 평서문이 되고, 올리면 의문문이 된다. 억양은 단순히 감정 표현이 아니라, 문법적 기능을 하는 언어 요소다.
**성조(tone)**는 단어 수준에서 음의 높낮이가 의미를 구별하는 것이다. 중국어의 사성(四聲)이 대표적이다. 'ma'를 평탄하게 발음하면 '엄마(媽)', 올리면 '삼'(麻), 내렸다 올리면 '말(馬)', 내리면 '꾸짖다(罵)'다. 태국어, 베트남어, 많은 아프리카 언어들이 성조 언어다. 성조 언어를 배우는 것이 한국어 화자에게 어려운 이유 — 우리는 성조를 음소로 처리하는 신경회로를 가동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3부. 프로젝트 — 직접 해보기
이제 실제로 손을 움직여볼 시간이다. 이론은 문제를 풀면서 진짜 내 것이 된다. 다음 문제들은 정답 없이 제공된다. 40분을 투자해서 최대한 혼자 생각하고 분석해보라.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그 막힘이 바로 네가 이해가 필요한 지점이다.
[프로젝트 A: IPA 전사 (약 15분)]
IPA 전사는 실제 발음을 기호로 받아 적는 것이다. 철자가 아닌 소리에 집중해야 한다.
문제 A-1: 다음 한국어 단어들을 IPA로 음성 전사하라. 표준 발음법에 따라 실제로 어떻게 소리 나는지를 대괄호 [ ] 안에 적으면 된다. (힌트: '먹다'는 [mʌkta]가 아니라 실제 발음을 써야 한다. 받침이 어떻게 실현되는지, 연음이 일어나는지 생각해보라.)
① 국물 ② 신라 ③ 한국어 ④ 먹었어 ⑤ 입학 ⑥ 논문 ⑦ 칼날 ⑧ 닫혀
문제 A-2: 다음 영어 단어들을 IPA로 전사하라. 영어는 철자와 발음이 특히 다르다는 점에 주의하라.
① thought ② through ③ rough ④ choir ⑤ photography ⑥ comfortable ⑦ colonel ⑧ Wednesday
문제 A-3: 아래 두 쌍의 단어를 IPA로 전사하고, 두 단어 간에 어떤 소리 차이가 있는지 설명하라. 그리고 그 차이가 한국어 화자에게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를 음성학적으로 설명해보라.
① 영어: ship [?] / sheep [?] ② 영어: bit [?] / beat [?]
[프로젝트 B: 최소대립쌍과 음소 분석 (약 10분)]
문제 B-1: 다음 중 한국어에서 최소대립쌍을 이루는 것을 모두 찾아라. 그리고 각 쌍이 어떤 음소의 대립을 보여주는지 설명하라.
① 발 / 팔 ② 물 / 뭐 ③ 불 / 풀 ④ 살 / 쌀 ⑤ 감 / 잠 ⑥ 마음 / 이음
문제 B-2: 영어의 [l]과 [r]은 영어에서는 서로 다른 음소다 ('light'와 'right'는 의미가 다르다). 그렇다면 이 두 소리는 한국어에서 어떤 관계인가? 한국어 화자가 영어의 l/r을 구분하기 어려운 이유를, 음소-이음 개념을 사용해서 설명해보라. (힌트: 한국어 'ㄹ'의 이음에는 무엇이 있는가? 어두에서의 ㄹ과 모음 사이의 ㄹ은 같은 소리인가 다른 소리인가?)
[프로젝트 C: 음운 규칙 적용 (약 10분)]
문제 C-1: 다음 단어들에서 어떤 음운 규칙이 적용되었는지 분석하라. 기저형(기본 형태)에서 표면형(실제 발음)으로 어떻게 변했는지를 규칙 이름과 함께 설명하라.
① 독립 → [동닙] ② 겨울비 → [겨울삐] ③ 옷이 → [오시] ④ 하얗다 → [하야타] ⑤ 닭이 → [달기] ⑥ 좋아 → [조아]
문제 C-2: 아래는 가상 언어 'X어'의 음운 규칙이다. 다음 규칙을 읽고, 주어진 기저형에서 표면형을 예측해라.
X어 규칙: 무성 파열음은 비음 뒤에서 유성 파열음이 된다. (무성: p, t, k → 유성: b, d, g)
기저형: ① /anta/ ② /empu/ ③ /imka/ ④ /tatap/ ⑤ /anpan/
[프로젝트 D: 언어의 자의성과 체계성 (약 5분)]
문제 D-1: 소쉬르의 자의성 원리에 따르면 기표와 기의의 연결은 자의적이다. 그런데 다음의 경우를 생각해보라. 어떤 점에서 '완전한 자의성'이라는 주장에 문제가 제기될 수 있는가? 최소한 두 가지 논거를 만들어보고, 소쉬르가 이에 어떻게 반박할지도 상상해서 써보라.
① 의성어와 의태어의 존재 ② 수화(Sign Language)에서 일부 도상적 기호 ③ 같은 언어 내에서 관련 단어들이 공유하는 소리 패턴 (예: 'gleam', 'glitter', 'glimmer', 'glow' — 모두 'gl-'로 시작하며 빛과 관련)
문제 D-2: 체계성의 개념을 이용해서 다음을 설명해보라. '개'라는 한국어 단어의 의미는 '그 소리 안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단어들과의 차이에서 오는 것인가? '개'가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어떤 다른 단어들과의 구별이 필요한가?
4부. 평가 기준 안내
이 1단계의 평가는 세 가지 영역으로 구성된다. **IPA 전사 테스트(35점)**는 실제 음성 전사의 정확성을 본다 — 단순히 기호를 외웠는지가 아니라, 실제 발음 과정을 이해하고 기술할 수 있는지를 평가한다. **음운분석표 완성도(40점)**는 네가 만들게 될 '외국어 발음 분석표'로, 한국어와 영어(또는 다른 외국어) 의 음소 목록을 대조하고, 어떤 음소가 한국어에는 없어서 학습자에게 어려운지, 그리고 그 오류를 교정하는 방법을 제안하는 표다. **음운규칙 적용 실습(25점)**은 위 프로젝트 C처럼 규칙을 식별하고 적용하는 능력을 본다. 이 세 가지를 합산하면 100점이 된다.
프로젝트 A~D를 성실히 마쳤다면, 네 머릿속에는 이미 이 평가를 통과할 재료들이 들어가 있다. 언어학의 핵심은 암기가 아니라 패턴을 보는 눈이다. 소리들 사이의 관계, 규칙의 체계, 그 안에 숨어있는 논리를 보는 눈. 그 눈이 생기기 시작했다면, 1단계의 목표는 달성된 것이다.
참고문헌: F. de Saussure, Cours de linguistique générale (1916); Peter Ladefoged & Keith Johnson, A Course in Phonetics (7th ed., 2014); John Goldsmith (ed.), The Handbook of Phonological Theory (1995); 이진호, 『국어 음운론 강의』(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