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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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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학 3단계: 공간을 설계한다는 것


이론적 기초 — 설계 이전에, '생각'이 먼저다

1단계에서 너는 비트루비우스의 세 원칙, 즉 **견고함(Firmitas), 유용함(Utilitas), 아름다움(Venustas)**을 배웠다. 2단계에서는 역사 속 건축가들이 각자의 시대에 어떤 방식으로 그 세 가지를 조화시켰는지를 살펴봤다. 이제 3단계에서 너는 처음으로 스스로 그 균형을 잡아야 한다. 다시 말해, 이 단계는 '보는 사람'에서 '만드는 사람'으로 전환되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설계는 어디서부터 시작될까?

많은 사람들이 건축 설계를 "예쁜 외관을 그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 건축가들에게 설계의 출발점은 전혀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은 바로 **"이 공간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다. 루이스 칸(Louis Kahn)은 이렇게 말했다: "A great building must begin with the unmeasurable, must go through measurable means when it is being designed, and in the end must be unmeasurable again." 번역하면, 위대한 건물은 측정할 수 없는 것(인간의 욕구, 감정, 경험)에서 시작해서, 측정 가능한 수단(도면, 치수, 구조)을 거쳐, 다시 측정할 수 없는 것(감동, 장소성)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1단계에서 배운 스케일과 동선 개념을 기억하는가? 이 단계에서 그것들이 비로소 '설계 도구'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설계를 시작하기 위해 건축가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무엇일까? 바로 **브리프(Brief)**를 분석하는 것이다. 브리프란 건축주(클라이언트)가 건축가에게 전달하는 요구 사항의 총체로, "나는 이런 공간이 필요하다"는 서술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30평 규모의 1인 카페, 조용한 독서와 커피를 즐길 수 있는 공간, 자연광이 많이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것이 하나의 브리프다. 건축가는 이 브리프에서 공간의 목적, 사용자, 규모, 분위기를 읽어내고 설계 방향을 잡는다.

[노트 기록] 브리프(Brief): 클라이언트가 건축가에게 전달하는 설계 요구 사항의 총체. 목적, 사용자, 규모, 예산, 분위기 등을 포함한다.


프로그램(Program)이란 무엇인가 — 공간을 언어로 번역하기

브리프를 받은 건축가가 다음으로 하는 일은 **프로그래밍(Programming)**이다. 이것은 컴퓨터 코딩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건축에서 프로그램이란 "공간에 담길 활동과 기능의 목록"을 의미하며, 동시에 그 활동들 간의 관계를 정리하는 작업이다. 건축이론가 도나 던(Donna Duerk)은 저서 Architectural Programming and Predesign Manager(1993)에서 프로그래밍을 "설계 이전의 체계적인 정보 수집과 분석 과정"으로 정의한다. 쉽게 말해, 집을 짓기 전에 그 집 안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를 먼저 목록으로 만드는 것이다.

카페를 예로 들어보자. 카페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커피를 주문하고, 음식을 받고, 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나누거나 책을 읽고, 화장실을 가고, 바리스타는 에스프레소를 추출하며, 매니저는 재고를 관리하고, 청소를 한다. 이 모든 '활동'을 공간으로 변환한 것이 바로 프로그램이다. 카운터(주문), 주방(커피 제조), 홀(착석), 화장실, 창고(재고), 직원 공간으로 나뉘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점은 각 공간에 **면적(Area)**과 **요구 조건(Requirements)**이 붙는다는 것이다. 홀은 최소 몇 명을 수용해야 하는가? 주방은 환기가 필요한가? 이런 질문들이 프로그램을 만든다.

[노트 기록] 공간 프로그램(Space Program): 공간 내 활동 목록 + 각 공간의 면적 + 요구 조건을 정리한 표. 설계의 '설계도 이전 설계도'라 할 수 있다.

스스로 생각해보자: 네가 지금 있는 교실에 어떤 '프로그램'이 담겨 있는가? 선생님이 수업을 진행하는 공간, 학생들이 앉는 공간, 칠판과 스크린이 있는 벽면, 출입문, 창문. 이것들 각각이 프로그램의 요소다. 그리고 이 요소들이 "선생님 쪽에 칠판이 있고 학생들이 그것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앉는다"는 관계를 형성한다. 바로 이 관계가 다음에 배울 **조닝(Zoning)**으로 이어진다.


조닝(Zoning) — 공간을 나누고 연결하는 논리

프로그램을 통해 필요한 공간들을 나열했다면, 그다음 질문은 "이 공간들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다. 이것이 **조닝(Zoning)**이다. 조닝은 기능적으로 유사하거나 관계 깊은 공간들을 묶어 구역(Zone)으로 나누고, 그 구역들 간의 연결 방식을 정하는 작업이다. 건축가들은 이 과정에서 **버블 다이어그램(Bubble Diagram)**이라는 도구를 사용한다. 동그라미(버블)가 각각의 공간을 나타내고, 선이 연결 관계를, 선의 두께나 종류가 연결의 강도(얼마나 가까워야 하는가)를 나타낸다.

조닝에는 몇 가지 핵심 원리가 있다. 첫째는 공적 공간(Public Zone)과 사적 공간(Private Zone)의 분리다. 카페에서 손님이 드나드는 홀과 바리스타가 일하는 주방은 성격이 다르다. 홀은 공적이고, 주방은 반-사적(semi-private)이다. 1단계에서 배운 동선(Circulation) 개념을 다시 떠올려보자. 동선이란 사람이 공간 안에서 이동하는 경로다. 공적 동선과 사적 동선은 가능하면 분리하는 것이 좋다. 손님이 직원 전용 통로로 들어가거나, 직원이 손님 사이를 헤집고 다니지 않도록. 둘째는 서비스 공간(Served Space)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간(Servant Space)의 관계다. 이는 루이스 칸이 제시한 개념으로, 주요 활동이 이루어지는 공간(홀, 집무실)이 '섬기는 공간'(화장실, 창고, 설비실)을 거느리는 구조를 말한다.

[노트 기록] 버블 다이어그램(Bubble Diagram): 공간 간의 기능적 관계를 원(버블)과 선으로 표현하는 다이어그램. 설계의 초기 단계에서 조닝을 시각화하는 데 사용된다. / Served & Servant Space: 루이스 칸이 제안한 개념. 주요 기능 공간(섬김받는 공간)과 지원 공간(섬기는 공간)의 위계 관계.


설계 프로세스 — 브리프에서 도면까지

이제 전체 설계 프로세스를 흐름으로 살펴보자. 건축 설계는 일반적으로 다음 단계를 거친다. ① 기획(Briefing/Programming) → ② 개념 설계(Concept Design) → ③ 기본 설계(Schematic Design) → ④ 실시 설계(Design Development / Construction Documents). 이 흐름은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진행된다.

기획 단계는 앞서 설명한 프로그래밍과 조닝이다. 개념 설계 단계에서는 건축가가 **컨셉(Concept)**을 정한다. 컨셉은 단순히 "예쁘게 만들겠다"가 아니라, 이 건물이 가져야 할 핵심 아이디어다. 예를 들어 안도 다다오(Ando Tadao)는 물과 빛이라는 자연 요소를 컨셉으로 삼아 수많은 건물을 설계했다. 2단계에서 다룬 건축사 지식이 여기서 빛을 발한다. 역사 속 건축가들이 어떤 컨셉으로 작업했는지를 알면, 네가 컨셉을 잡을 때 훨씬 풍부한 레퍼런스를 갖게 된다. 기본 설계 단계에서는 컨셉을 도면으로 구현한다. 전체적인 배치, 층별 평면, 주요 입면이 결정된다. 실시 설계 단계에서는 시공에 필요한 모든 상세 정보가 담긴 도면을 만든다. 1단계에서 배운 평면도, 입면도, 단면도가 바로 이 단계의 산물이다.


모형 제작과 3D 모델링 — 공간을 손으로 이해하기

건축가들은 왜 모형을 만드는가? 도면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이 질문은 매우 좋은 질문이다. 도면은 2차원이다. 아무리 정교한 평면도를 그려도, 공간의 높이와 깊이, 빛이 들어오는 방향, 내부에서 느껴지는 스케일은 도면만으로는 파악하기 어렵다. **모형(Model)**은 설계 아이디어를 3차원으로 검증하는 도구다.

모형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스터디 모형(Study Model)**은 설계 과정에서 아이디어를 탐구하기 위한 모형으로, 폼보드나 골판지를 거칠게 잘라 빠르게 만드는 것이다. 완성도보다 속도와 아이디어 탐색이 목적이다. 반면 **프레젠테이션 모형(Presentation Model)**은 최종 설계안을 클라이언트나 심사위원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정밀도와 재현성이 중요하다. 실무에서는 스터디 모형을 수없이 만들고 부수는 과정을 반복하며 설계를 발전시킨다. 이는 1단계에서 배운 비례(Proportion) 개념이 실제 공간에서 어떻게 느껴지는지를 모형으로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디지털 세계에서는 3D 모델링이 이 역할을 상당 부분 대체하거나 보완한다. 가장 널리 쓰이는 툴은 초보자에게 SketchUp, 고급 설계에는 Rhino(라이노), 파라메트릭 설계에는 Grasshopper다. 3D 모델링의 핵심 원리는 실물 모형과 동일하다. **형태(Form)**를 잡고, 공간의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고, 빛과 그림자의 관계를 시뮬레이션하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3D 모델링이 단순히 예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설계 아이디어를 검증하고 소통하는 도구라는 것이다.

[노트 기록] 스터디 모형 vs 프레젠테이션 모형: 전자는 아이디어 탐색용(빠르고 거칠다), 후자는 최종 발표용(정밀하고 완성도 높다). / 주요 3D 툴: SketchUp(초급), Rhino(중급-고급), Grasshopper(파라메트릭).


지속가능한 건축 — 지구를 생각하는 설계

이제 이 단계의 마지막이자 가장 현대적인 주제로 넘어간다. **지속가능한 건축(Sustainable Architecture)**이란 무엇인가? 2단계에서 배운 현대 건축사를 떠올려보자. 20세기 중반까지 건축은 주로 인간의 편의와 기술적 과시에 집중했다. 하지만 1970년대 오일 쇼크를 겪으며 에너지 문제가 부각되었고, 1980-90년대부터 환경 지속가능성이 건축의 핵심 의제가 되었다. 오늘날 건축에서 지속가능성은 선택이 아닌 의무에 가깝다.

지속가능한 건축의 핵심 전략은 크게 **패시브 디자인(Passive Design)**과 **액티브 시스템(Active Systems)**으로 나뉜다. 패시브 디자인은 기계 설비에 의존하지 않고 건물의 형태, 배치, 재료만으로 에너지를 절약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겨울에 햇빛을 최대한 받아들이기 위해 건물을 남향으로 배치하고, 여름에 과열을 막기 위해 처마(overhang)를 설계한다. 이는 수천 년 전 한국 전통 건축에서도 이미 사용한 방법이다. 2단계에서 한국 건축의 전통을 배웠다면, 지붕 처마의 길이가 여름 태양 고도각을 계산해 설계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반면 액티브 시스템은 태양광 패널, 지열 히트 펌프, 폐열 회수 환기 시스템처럼 기술적 장치를 활용한다. 최상의 지속가능 설계는 패시브를 극대화하고 액티브를 보완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국제적으로는 LEED(Leadership in Energy and Environmental Design) 인증이, 한국에서는 G-SEED(녹색건축 인증) 제도가 지속가능성을 평가하는 기준이다. 이 인증들은 에너지 효율, 수자원 절약, 재료의 환경 영향, 실내 환경 질 등 다양한 항목을 점수화한다. 건축가 켄 요앙(Ken Yeang)은 저서 Ecodesign: A Manual for Ecological Design(2006)에서 생태적 설계를 기후, 생물 다양성, 에너지 흐름, 물질 흐름의 통합으로 정의한다.

[노트 기록] 패시브 디자인(Passive Design): 기계 없이 건물 형태와 배치만으로 에너지를 절약하는 설계 전략 (일조, 자연 환기, 단열 등). 액티브 시스템(Active Systems): 태양광, 지열 등 기술적 장치를 이용한 에너지 절약. / LEED / G-SEED: 국제/국내 녹색건축 인증 제도.


프로젝트 문제 — 스스로 설계해보기

이론을 충분히 이해했다면 이제 손을 움직일 시간이다. 아래 세 가지 문제는 순서대로 풀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각각 앞에서 배운 개념을 직접 적용하는 연습이다. 정답은 없다. 네가 논리적으로 선택하고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으면 된다. 손으로 그리거나 종이에 적는 것을 추천한다.


[문제 1] 공간 프로그래밍 — "나만의 작업실" 설계하기

너는 어느 건물 3층에 있는 30㎡(약 9평) 규모의 빈 공간을 하나 받았다. 이 공간을 "고등학생 크리에이터를 위한 1인 작업실"로 설계하려 한다. 이 공간에서는 영상 촬영 및 편집, 드로잉과 스케치, 독서와 공부, 간단한 음료 준비, 짧은 낮잠이 가능해야 한다. 먼저 이 다섯 가지 활동 각각을 위한 공간을 정의하라. 각 공간에 어떤 가구와 장비가 필요한가? 각 공간에 최소 몇 ㎡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전체 합이 30㎡를 넘지 않아야 한다. 다섯 공간 외에 반드시 포함해야 하지만 네가 빠뜨린 공간이 있을 수도 있다. 무엇일까? 공간 프로그램을 표 형태로 정리하고, 각 공간의 요구 조건(창문 필요 여부, 조용해야 하는지, 환기 필요 여부 등)을 함께 적어라.


[문제 2] 버블 다이어그램과 조닝 — 동선을 설계하라

문제 1에서 만든 공간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버블 다이어그램을 그려라. 각 공간을 원으로 표현하고, 자주 연결되어야 하는 공간들 사이에는 굵은 선을, 가끔만 연결되는 공간들 사이에는 얇은 선을 그어라. 그 다음, 30㎡ 직사각형 평면도 위에 각 공간을 배치하라(정확한 치수가 아닌 대략적인 면적 비율로 그려도 된다). 이때 다음 질문에 스스로 답하면서 배치를 결정하라. 촬영 공간은 창문 쪽에 있어야 하는가, 없어야 하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낮잠 공간은 어디에 위치해야 가장 적절한가? 출입문을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보이는 공간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배치 완료 후, 네가 한 선택의 이유를 각 공간별로 한 줄씩 적어라.


[문제 3] 지속가능성 적용 — 패시브 설계 전략을 더하라

문제 2에서 완성한 평면 배치를 유지하면서, 이 작업실에 패시브 디자인 전략을 세 가지 이상 적용하라. 단, 태양광 패널처럼 돈이 드는 장치(액티브 시스템)는 사용하지 않는다. 오직 창문의 위치/크기, 벽의 재료, 공간 배치, 환기 방식 등 형태적·재료적 전략만 허용된다. 서울의 위도는 약 37.5°N이다. 여름 태양은 높이 뜨고 겨울 태양은 낮게 뜬다. 이 사실이 창문 설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자연 환기를 극대화하려면 창문을 어디에 어떻게 배치해야 하는가? 단열이 중요한 벽면은 어느 방향인가? 세 가지 전략 각각에 대해, 왜 그 전략이 이 공간에 적합한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라. 마지막으로, 이 세 가지 전략이 적용된 평면도를 수정하고, 변경된 부분을 표시하라.


세 문제를 다 풀었다면, 문제 1에서 3까지의 결과물이 하나의 설계 프로세스 흐름—프로그래밍 → 조닝 → 지속가능성 적용—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단계에서 배운 공간 설계 프로세스다. 다음 단계에서는 이 공간에 인테리어와 조명, 그리고 사용자 경험의 층위가 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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